
운동을 하고 늦은 저녁하와이 대저택님의 유튜브 에피소트를 한편 보고나서
필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끄적여 본다.
늘 변화할 동기를 유방하는 에피소드를 만들어 주는
하와이 대저택님에 감사한다.
https://youtu.be/Kr5XKcbeoVY?si=nXmGB2RUXj6xxQfE
손 하나가 반란을 일으켰다
— 무의식과 의식 사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릴 때 왼손잡이였던 나는 선생님의 지도 아래 오른손으로 글씨를 고쳐 썼다. 그 과정이 꽤 오래 걸렸고,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오른손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가끔 붓을 들거나 낯선 도구를 쓸 때면, 왼손이 먼저 움직이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이 든다. 저 손은 나인가, 아닌가.
그 물음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하와이 대적택의 예일대학교 신경과학자 엘리에저 스탠버그의 책을 주제로한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였다.
뉴저지에 살던 카렌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심각한 간질을 앓아온 그녀는 결국 좌뇌와 우뇌를 잇는 신경 다발, 뇌량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발작이 멈췄다. 그런데 그 대신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카렌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른손이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바로 그 순간,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더니 담배를 낚아채 재떨이에 눌러 껐다. 카렌은 왼손에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왼손은 며칠 후 오른손이 잠근 셔츠 단추를 혼자 풀어버렸고, 한 번은 카렌 자신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카렌은 울면서 의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제 왼손이 더 이상 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제 안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서 잠시 멈춤을 눌렀다. 그리고 내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는 보통 '나'라는 존재가 하나라고 믿는다. 생각하고 결정하는 나, 그 하나의 나가 몸 전체를 지휘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카렌의 이야기는 그 믿음에 조용히 균열을 낸다. 뇌량이 끊어진 카렌의 몸에는 사실 두 명의 '나'가 동거하고 있었다. 좌뇌의 나와 우뇌의 나. 좌뇌는 담배를 원했고, 우뇌는 건강을 걱정했다. 두 나는 같은 몸을 쓰면서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의학 용어로는 에일리언 핸드 증후군,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이 이름이 조금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손은 외계인의 것이 아니었다. 카렌이 미처 알지 못했던, 카렌 자신의 일부였으니까.
스탠버그는 이 사례를 통해 우리 뇌 안에는 두 개의 시스템이 병렬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의식 시스템.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하는, 그 사유하는 뇌다. 다른 하나는 습관 시스템. 자전거를 탄 채 딴생각을 해도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배운 것을 의식 없이 실행하는 뇌다.
이 두 시스템의 경계가 우리 일상 어디에 있는지 한번 떠올려보라. 오늘 아침 출근길, 어느 골목에서 어느 신호등을 건넜는지 기억하는가. 냉장고를 열었다가 왜 열었는지 잊어버린 채 닫아본 적은 없는가. 스마트폰 화면을 켜고 아무 목적 없이 스크롤하다가 10분이 지난 것을 뒤늦게 깨달은 순간은. 뇌과학자들은 그런 상태를 '좀비 모드'라고 부른다. 몸은 움직이고 있으나 의식은 부재중인 상태. 농담처럼 들리지만, 수면 보행증 환자들이 잠든 채로 운전을 하고 요리를 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나 역시 문득 깨달았다. 내 하루 중 내가 진정으로 '깨어 있던' 시간이 얼마나 될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더 불편하다.
워싱턴대학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 네 가지를 들려주었다. 그중 세 가지는 진짜였고, 하나는 완전히 지어낸 것이었다. 다섯 살 때 쇼핑몰에서 길을 잃어 낯선 할아버지가 데려다줬다는 이야기. 실제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참가자의 약 사 분의 일이 그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파란 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세부 사항까지 스스로 만들어냈다.
뇌는 카메라가 아니다. 기억은 저장된 파일이 아니라, 꺼낼 때마다 새로 재구성되는 이야기다. 퍼즐 조각 몇 개가 사라지면, 뇌는 빈자리를 스스로 메운다. 그것도 너무나 그럴싸하게. 의학에서는 이것을 작화증이라고 한다. 한자로 풀면 꾸밀 작(作), 말씀 화(話), 증상 증(症). 이야기를 꾸며내는 증상. 하지만 이 증상을 가진 사람은 결코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뇌가 진심으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싸울 때 서로 기억이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둘 다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둘 다 자신의 뇌가 재구성한 버전을 진심으로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분명히 봤어', '내가 확실히 들었어'라는 말은, 사실 '내 뇌가 그렇게 재구성했어'와 다르지 않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나는 그간의 다툼 여러건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 기억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어딘가에 켜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작은 의심 하나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실험은 그보다 더 소름 돋는다. 그는 뇌량을 절단한 환자에게, 우뇌에만 보이도록 '걸어라'는 명령을 보냈다. 환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연구자가 물었다. 왜 걷고 있습니까. 환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갈증이 나서 콜라 가지러 가는 중입니다.
완전한 창작이다. 갈증 때문이 아니었다. 우뇌가 명령을 받아 몸이 움직인 것인데, 좌뇌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즉석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자니가는 이 기능을 '해석자'라고 불렀다. 우리 뇌 안에는 스물네 시간 가동되는 시나리오 작가가 살고 있다. 그 작가는 이유가 없으면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어낸 이유를 진심으로 믿는다.
충동적으로 물건을 산 뒤 '요즘 꼭 필요했던 거야'라고 설명하는 자신, 감정이 먼저 치솟은 뒤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는 자신, 어떤 사람을 싫어하면서도 그럴듯한 명분을 찾고 있는 자신. 그것이 바로 해석자의 솜씨다. 충동이 먼저 오고, 이유는 나중에 온다.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춰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 사람 곁에 있는가. 나는 왜 이 선택을 했는가. 떠오르는 대답들이 과연 진짜 이유인지, 아니면 해석자가 갖다 붙인 각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알 수 없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오히려 해방감을 줄것 같았다. 내가 만들어낸 이유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이유를 다시 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1880년 프랑스에 코타르라는 신경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진료실에 43세 여성이 찾아와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뇌가 없습니다. 신경도 없고, 가슴도 내장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녀는 식사를 거부했다. 죽은 사람에게 음식이 왜 필요하겠느냐고.
코타르 증후군. 별명은 워킹데드 증후군이다. 그녀는 연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뇌가 진심으로 나는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현대 뇌과학은 그 메커니즘을 밝혀냈다. 얼굴을 인식하는 부위와 그 얼굴에 감정적 친숙함을 부여하는 편도체의 연결이 끊기면,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아도 '나'라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뇌는 이 이상한 괴리를 설명해야 한다. 해석자가 가동된다. 그리고 찾아낸 가장 합리적인 답이 이것이었다. 아, 내가 죽었구나.
말도 안 되는 결론 같지만, 뇌의 논리로는 완벽하게 타당하다. '내 몸인데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잖아. 그러니 나는 죽은 게 틀림없어.' 이것이 뇌가 스스로를 속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단순한 의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나'라는 감각은 영혼이나 정신 같은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뇌의 여러 부위가 정교하게 협력해 매 순간 만들어내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연결선 하나가 끊어지면, 나는 나를 잃어버린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이 순간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그냥 주어지는 기적.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허무주의로 귀결되는가.
뇌가 알아서 다 조종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눈을 감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실제 연주할 때와 거의 같은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경기 전 수백 번의 멘탈 리허설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300km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바이크 선수들이 경기전 상상으로 트랙을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것이 실간난다. 상상이 곧 연습이 된다. 뇌는 그 상상을 실제 경험으로 기억한다.
거울 뉴런이라는 것도 있다. 다른 사람이 다치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움찔하는 것은, 뇌가 그 고통을 내 안에서 실제로 시뮬레이션하기 때문이다. 공감은 마음씨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물리적 반응이다. 내 뇌 안에 당신이 살고 있고, 당신의 뇌 안에 내가 살고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무의식은 단순히 우리를 속이는 기계가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향이다. 그 무의식에 무엇을 심느냐.
나는 결국 영상의 말미에 한 문장이 스쳐갔다다. 스탠버그가 직접 쓴 문장은 아니고 하와이 대저택님이 한말도 아니지만, 책을 덮고 나서 내 안에 남은 문장이다.
"뇌가 얼마나 선량한 동기를 품느냐, 얼마나 밝은 이유를 갖게 되느냐. 그리고 그 무의식을 얼마나 자주 의식의 빛 아래로 끌어올리느냐. 아마도 그것이 인생의 핵심일지 모른다."
무의식이 95%를 운전한다면, 그 운전대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습관을 바꾸는 것, 매일 마주하는 이미지와 언어를 바꾸는 것, 자주 상상하는 장면을 바꾸는 것. 그것들이 결국 무의식에 새로운 씨앗을 심는 행위들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아는 것. 내가 지금 좀비 모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내 기억이 조작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내가 내린 결정의 이유가 해석자의 각본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아는 것 자체가 깨어나는 것이다.
카렌은 결국 치료를 통해 자기 왼손과 화해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완벽하게 통제하게 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가끔 왼손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카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요. 이 손도 결국 나잖아요. 내가 몰랐던 나의 일부인 거죠.
나는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낯설다고 느끼는 것들, 이유 없이 치솟는 감정, 의도하지 않은 행동, 때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들. 그것들이 어쩌면 내가 몰랐던 나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방해물이 아니라, 수십만 년에 걸쳐 나를 지키려고 만들어진 시스템의 일부.
신경과학자 올리버 색스는 말했다. 뇌의 결함이 우리를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함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기억이 가끔 틀리고, 이유가 가끔 지어지고, 판단이 가끔 빗나가도. 그 불완전한 뇌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음악에 눈물 흘리고, 어제의 실패에서 내일을 끌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잠깐 달린다. 습관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작고, 철학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소박하지만, 그 작은 반복이 무의식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다고 믿는다. 선량한 동기를, 밝은 이유를.
그게 전부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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