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도 아픔도 기쁨도, 이제는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해졌다.
요즘의 변화를 말하자면 이 한 문장이 가장 가깝다.
감정이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슬프고, 아프고, 기쁘다.
다만 그 마음이 얼마나 커질지에 내가 관여할 여지가 생겼다는 뜻이다.
조절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라디오의 볼륨이 떠오른다.
소리를 조금 낮춘다고 흘러나오는 노래가 다른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슬픔의 크기가 달라져도 슬펐던 이유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픔을 조금 덜어낸다고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되지도 않는다.
기쁨까지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조금 낯설다.
슬픔과 아픔은 덜어내고 싶지만, 기쁨은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쁜 마음에도 크기와 자리가 있을 수 있다.
얼마나 크게 드러내느냐와 얼마나 소중하게 느끼느냐는 꼭 같은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이 변화를 곧바로 성숙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감정을 다루는 일과 감정을 못 느낀 척하는 일은 다를 테니 말이다.
편안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변화가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덜 흔들리는 마음과 아무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태도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모든 감정을 끝까지 크게 느껴야만 진심인 것도 아니다.
오래 슬퍼해야 그만큼 소중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닐 테고, 아픔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그 일이 중요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감정의 크기로 마음의 진위를 따지기 시작하면, 편해진 자신에게도 괜한 설명을 요구하게 된다.
내가 말하는 조절은 어느 쪽에 가까운 것일까.
마음을 닫는 일보다는 마음에 자리를 정해 주는 일이면 좋겠다.
슬픔도 아픔도 기쁨도 들어올 수 있지만, 어느 하나가 내 하루의 자리를 전부 차지하지는 않는 것.
감정을 지우지 않고도 다른 마음이 함께 있을 여백을 남기는 것이다.
앞으로도 늘 조절이 가능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어떤 날에는 슬픔이 예상보다 커질 수도 있고, 어떤 기쁨 앞에서는 굳이 볼륨을 낮추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날까지 실패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 언제나 조절해야 한다는 의무가 될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저 이 변화가 반갑다.
슬픔도 아픔도 기쁨도 그대로 내 삶에 두면서,
그 정도에는 조금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마음을 끄는 법이 아니라, 마음과 함께 지내는 법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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