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용은 무장해제가 아니고, 정의는 망각이 아니다
한국 정치에는 오래된 비대칭이 있다.
어느 쪽이 권력을 잡으면 검찰·경찰·국세청·감사원 같은 사정기관의 칼끝이 반대편으로 향한다는 의혹이 되풀이된다. 다른 쪽이 권력을 잡으면 '통합'과 '화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먼저 쏟아진다. 진보 정부가 전임 정부의 과오를 따지면 '정치보복'이라 불리고, 보수 정부가 같은 일을 하면 '법과 원칙'이라 불린다.
같은 행위에 다른 이름이 붙는 이 언어의 비대칭은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다. 민주 진보 진영은 스스로 도덕을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독재에 맞선 역사, 인권과 절차에 대한 약속이 그들의 출생증명서였다. 그러니 세상은 그 증명서에 적힌 잣대를 그들에게 그대로 들이댄다. 보수는 성과로 평가받고, 진보는 품격으로 평가받는다. 도덕적 우위는 자산인 동시에 족쇄다. 상대가 진흙탕에서 싸울 때 홀로 흰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이것이 "왜 우리만 참아야 하느냐"는 지지자들의 오래된 울분의 정체다.
그러나 울분이 곧 해답일 수는 없다.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포용과 면책을 혼동하는 습관이다.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고, 책임은 법의 몫이다. 1997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법정에서 단죄를 받은 뒤 사면되었다. 그 사면이 진정한 통합을 낳았는지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프랑스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30,000여일이 지나갔지만 여전 나치 부역자는 용서치 않는다. 우리도 그랬다면... 분명한 교훈이 하나 있다. 진실 규명과 책임 추궁을 건너뛴 용서는 관용이 아니라 망각이며, 망각은 반복의 토양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를 청산한 나라들이 '용서'보다 '기록'을 먼저 세운 데는 이유가 있다.
보수 진영은 진보 정부 시절의 '적폐청산' 수사 역시 사정기관을 동원한 정치보복이었다고 본다. 또 학계와 언론 일각에서는 사정기관의 정치화가 특정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역대 모든 정부에 공통된 구조적 문제라는 평가가 많다.
그렇다면 상대가 사정기관을 휘둘렀으니 이쪽도 똑같이 휘두르면 되는가. 그것은 더 깊은 함정이다. 문제의 본질은 누가 칼을 쥐느냐가 아니라, 칼이 정권의 사유물이 되는 구조 자체에 있다. 칼을 되갚아 휘두르면 승리는 다음 선거까지만 유효하다. 남는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임자를 법정에 세우는 보복의 순환이고, 그 순환 속에서 가장 크게 다치는 것은 사정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진보가 택할 길은 참는 것도 되갚는 것도 아니다. 칼집을 바꾸는 것이다. 사정기관의 독립성을 제도로 못 박고, 수사와 기소의 권한을 견제 가능한 구조로 재편하며, 감사의 중립성을 인사와 예산에서부터 보장하는 일이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 제도가 자기 편에도 똑같이 들이대질 때에만 개혁은 정당성을 얻는다. 권력을 잡았을 때 내려놓는 칼만이 진짜 개혁이다. 야당 시절에 외치는 독립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진보가 더 정의로워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도, 순진해서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규칙은 이긴 쪽이 지킬 때에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규칙을 지킨 쪽이 손해만 보는 구조라면 그 구조는 고쳐야 한다. 그러나 손해가 억울하다고 규칙 자체를 버리는 순간, 싸워야 할 상대와 구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때 잃는 것은 한 번의 정권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다.
관용은 강요된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진실과 책임이라는 단단한 바닥 위에서만 설 수 있다. 용서하되 잊지 않고, 단죄하되 보복하지 않으며, 권력을 쥐되 그 권력을 스스로 묶는 것. 정의는 상대를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다. 다음 정권,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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