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두 단어

Agility, 그리고 Integrity
AI 관련 뉴스를 읽다가 이 복잡 다변화한 세상에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할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고 커리어를 거쳐오면서 나는 무엇에 기준을 두고 살았었는지 돌아 봤습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단어 두 개를 마음속 지갑 속에 넣고 다녔습니다. 지폐도 아니고 명함도 아닌, 그냥 단어. 정확히는 영어 단어 두 개. 'Agility'와 'Integrity'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그 다음 할 말을 잃거나 뭔가 깊은 말 같기도 하고, 그냥 영어 단어 두 개 같기도 한 그 묘한 표정. 저는 그 묘한 표정이 좋았습니다.
사실 이 단어들과의 인연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여러 인더스트리와 회사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며 한국 사회에서 경력이란 건 종종 정글처럼 자라납니다. 울창하고 무성하지만, 길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 안에서 저 역시 꽤 자주 방향을 잃었고, 그보다 더 자주 자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어느 날 밤, 회의실 창밖을 보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먼저, '나는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가.'
첫 번째 단어, Agility. 민첩함. 유연함. 이 단어를 처음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스타트업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빠르다'는 건 덕목이 아니라 생존이었습니다. 어제 세운 계획이 오늘 쓸모 없어지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환경. 처음에는 그게 무질서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원래 나름 꼼꼼한 사람입니다. 계획을 세우고, 검토하고, 다시 검토하는 타입. 그런 제가 '일단 해봐요'의 세계로 들어갔으니, 처음엔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일으켰던 거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Agility란 그냥 빠른 게 아니라 '변화에 저항하지 않는 능력'이며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갈대 같은 것이라는 것을요. 나무처럼 뻣뻣하게 버티다간 부러지는 게 인생이고, 갈대처럼 적당히 휘어야 살아남습니다. 다만, 완전히 누워버리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눕는 것과 휘는 것은 다르다. Agility는 제게 '버텨라'가 아니라 '움직여라'를 가르쳤습니다.
두 번째 단어, Integrity. 진실성. 일관성. 도덕적 온전함. 번역이 여러 개인 단어는 보통 그만큼 복잡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어를 한마디로 이렇게 풀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회의실에서와 복도에서, 윗사람 앞에서와 아랫사람 앞에서,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과 찍은 후에. 같은 사람.
Integrity를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했습다. 솔직히 말하면, 때로는 '그냥 맞춰주는 게 편하겠다'는 유혹이 오기도 합니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힘 있는 쪽에 살짝 기울어지고, 불편한 진실은 살짝 덮어두는. 그렇게 하면 분명 더 매끄럽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걸 모르지 않지만 그렇게 살면 결국 내가 없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편리하게 모양을 바꾸다 보면 어느 순간 원래 형태가 뭐였는지 잊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실종이 두려웠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두 단어가 서로 긴장 관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Agility는 '바꿔라'고 말하고, Integrity는 '바꾸지 마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마치 '따뜻하면서 차갑게'나 '빠르면서 천천히' 같은 말처럼 모순처럼 느껴져습니다. 유연하면서 동시에 일관된다는 게 가능한 건가?
하지만 오랜 시간 이 두 단어와 씨름하면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Agility는 방법의 문제이고, Integrity는 방향의 문제 였습니다. 방법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느냐, 어떤 속도로 달리느냐, 언제 멈추고 언제 돌아가느냐. 하지만 어디를 향해 가느냐, 그리고 가는 내내 내가 나인가 하는 것은 바꾸지 않습니다. 나침반은 흔들려도 북쪽은 언제나 북쪽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십에 가까워 이 두 단어를 다시 꺼내 들여다보니,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젊을 땐 Agility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것, 기회를 잡는 것, 적응하는 것. 하지만 지금은 Integrity 쪽에 무게가 더 실리는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내가 누구였는지'를 지키는 일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든 조금씩 구겨가려고 하기 때문이죠.
지금도 저는 이 두 단어를 자주 꺼내 읽습니다. 결정을 앞두고 망설일 때, 사람에게 치이고 지쳤을 때, 혹은 그냥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을 때. 그 두 단어는 언제나 묵묵하게 거기 있으니까요.
'움직여도 괜찮아. 단, 너는 잃지 마.'
거창한 철학이 아닙니다. 그냥 저를 지키기 위해 골라든 두 단어. 누군가에게는 다른 단어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단어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그런 단어가 있느냐입니다.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것, 길을 잃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것. 지갑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지만, 인생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것.
점점 더 여러 도구들로 매일 새로운 시대 우리는 어떤 단어를 품고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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