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두 단어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두 단어
Agility, 그리고 Integrity
나는 꽤 오랫동안 단어 두 개를 마음속 지갑 속에 넣고 다녔다. 지폐도 아니고 명함도 아닌, 그냥 단어. 정확히는 영어 단어 두 개. 'Agility'와 'Integrity'.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그다음 할 말을 잃는다. 뭔가 깊은 말 같기도 하고, 그냥 영어 단어 두 개 같기도 한 그 묘한 표정. 나는 그 표정이 좋다.
사실 이 단어들과의 인연은 거창하지 않다. 여러 인더스트리와 회사들 그리고 사람들을만나며 한국 사회에서 경력이란 건 종종 정글처럼 자란다. 울창하고 무성하지만, 길을 잃기 쉽다. 그 안에서 나는 꽤 자주 방향을 잃었고, 그보다 더 자주 나 자신을 잃을 뻔했다. 어느 날 밤, 회의실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먼저, '나는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가.'
첫 번째 단어, Agility. 민첩함. 유연함. 이 단어를 처음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스타트업에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빠르다'는 건 덕목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어제 세운 계획이 오늘 쓸모없어지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환경. 처음에는 그게 무질서처럼 보였다. 나는 원래 꼼꼼한 사람이다. 계획을 세우고, 검토하고, 다시 검토하는 타입. 그런 내가 '일단 해봐요'의 세계로 들어갔으니, 처음엔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Agility란 그냥 빠른 게 아니라 '변화에 저항하지 않는 능력'이다.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갈대 같은 것. 나무처럼 뻣뻣하게 버티다간 부러지는 게 인생이고, 갈대처럼 적당히 휘어야 살아남는다. 다만, 완전히 누워버리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눕는 것과 구르는 것은 다르다. Agility는 내게 '버텨라'가 아니라 '움직여라'를 가르쳤다.
두 번째 단어, Integrity. 진실성. 일관성. 도덕적 온전함. 번역이 여러 개인 단어는 보통 그만큼 복잡한 개념을 담고 있다. 나는 이 단어를 한마디로 이렇게 풀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회의실에서와 복도에서, 윗사람 앞에서와 아랫사람 앞에서,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과 찍은 후에. 같은 사람.
Integrity를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하다. 솔직히 말하면, 때로는 '그냥 맞춰주는 게 편하겠다'는 유혹이 온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힘 있는 쪽에 살짝 기울어지고, 불편한 진실은 살짝 덮어두는. 그렇게 하면 분명 더 매끄럽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 나는 그걸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살면 결국 '나'가 없어진다는 것도 안다. 편리하게 모양을 바꾸다 보면 어느 순간 원래 형태가 뭐였는지 잊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실종.
재미있는 건, 이 두 단어가 서로 긴장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Agility는 '바꿔라'고 말하고, Integrity는 '바꾸지 마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게 모순처럼 느껴졌다. 마치 '따뜻하면서 차갑게'나 '빠르면서 천천히' 같은 말처럼 유연하면서 동시에 일관된다는 게 가능한 건가?
하지만 오랜 시간 이 두 단어와 씨름하면서 알았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 Agility는 방법의 문제이고, Integrity는 방향의 문제다. 방법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어떤 길로 가느냐, 어떤 속도로 달리느냐, 언제 멈추고 언제 돌아가느냐. 하지만 어디를 향해 가느냐, 그리고 가는 내내 내가 나인가 하는 것은 바꾸지 않는다. 나침반은 흔들려도 북쪽은 언제나 북쪽이어야 한다.
오십에 가까워 이 두 단어를 다시 꺼내 들여다보니,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젊을 땐 Agility가 더 중요해 보였다.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것, 기회를 잡는 것, 적응하는 것. 하지만 지금은 Integrity 쪽에 무게가 더 실린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내가 누구였는지'를 지키는 일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든 조금씩 구겨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이 두 단어를 자주 꺼내 읽는다. 결정을 앞두고 망설일 때, 사람에게 치이고 지쳤을 때, 혹은 그냥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을 때. 그 두 단어는 언제나 묵묵하게 거기 있다.
'움직여도 괜찮아. 단, 너는 잃지 마.'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그냥 나를 지키기 위해 골라든 두 단어. 누군가에게는 다른 단어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단어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그런 단어가 있느냐이다.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것, 길을 잃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것. 지갑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지만, 인생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것.